앞의 글에서 말한 '풍요를 끌어당기기 위함'을 이유로 명상에 관심을 깊게 갖게 되었다.
1년전 쯤 내면아이 치유를 위해 명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.
그 때 내면 아이를 많이 치유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, 새롭게 명상을 하면서 또 새로운 내면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.
처음 명상의 목적은 풍요였는데, 과정은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. 다 도움이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다.
글을 12장 가까이 써내려 가면서 잊고 있었던 사건들, 마음, 삶에서 상처였던 순간들을 꺼내 마주하고 그 때의 마음을 알아채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수용했다.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았다.
직장 생활, 육아생활 중 틈이 날 때마다 명상을 했고 '이대로 계속 명상을 하면 얼마나 더 가벼워질까.'하는 기대감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졌다.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오면 누워서 떠올리고, 알아치리고, 스스로를 안아주며 많이 울었다. 어릴 때 엄마와 있었던 일들은 1년 전에 많은 치유를 해서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'외로움'과 '분노'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. 명상을 하며 어릴 때의 상처받은 기억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, '괜찮다. 얼마나 힘들었니.니가 나의 경험이라 고맙다'하며 수용하고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기쁘기도 했다.
마음가짐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한 일은 '에고'와 '의식'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법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.
고통의 마음을 갖는 것은 '에고', 그런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은 '의식'.
의식의 입장에서 에고를 바라보면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마음과 분리될 수 있다.
아직 습관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통의 순간에 의식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유의미했다.
그런데
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.
처음의 나는 명상 하나면 어떤 일들도 별 일 아니게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나보다.
일을 하다가, 육아를 하다가 고통의 순간이 오면 의식의 입장으로 쉽게 가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는 내가 싫다는 마음이 드는 날들이 생겼다. '명상을 더 해야겠다.' '여기서 또 더 해야해?' '그렇게 흘려보냈는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내가 또 남아 있어?' 하는 마음의 소리가 생겨났다. '오늘은 펑펑 울고 뿌리 뽑아버려야지.' 라는 마음으로 명상에 임하면서 였을까.
한동안 명상을 해도 내면의 소리에 더 다가가 지지 않았다. 잠들어 버리거나, 잡생각으로 깊은 생각을 못하거나, 스스로가 명상을 별로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. 그리고 가슴이 꽉 막혀버린 느낌이 들었다. 치유하겠다면서 마음에 흙탕물은 일으켰는데 들여다 보아 지지는 않았다. 일상의 호흡을 들여다 보면 숨이 깊게 쉬어지지가 않았다.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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